페미니스트 모먼트 -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나영정, 김홍미리, 전희경 (2017, 그린비)
2015년 이후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책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며 조금의 피로감이 있었다. 그동안 드러날 시간과 공간을 찾지 못했던 여성들의 경험과 생각과 말이 터져나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고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굉장히 무겁게 느껴지다보니, 이런 종류의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라는 제목 때문에, 또다시 그 경험이 주는 무게감에 눌리고 싶지 않아서 책을 펼치지 않고 있다가, 믿는페미 5월 책모임에서 이 책을 선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었다. 헌데,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을까 싶더라.
워낙 페미니스트/퀴어 운동 판에서 기라성같은 저자들이 쓴 탓인지, 본인들의 '경험'에 대한 단순 서술이 아니라, 평가와 분석이 있었기에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권김현영 님의 모먼트는 나와 매우 유사하여 그의 글에서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이다. 손희정 님의 글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라는 호칭에 대한 고민을 얻었다. 지금껏 장기수 선생님을 호칭하면서도 '할아버니' 혹은 '할머니'와 같은 나이와 젠더가 드러나는 단어를 가끔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이 든 여성들의 투쟁'이라는 문장이 그 투쟁의 본질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채윤 님의 글에서는 '성별'이 아닌 '허구의 성차'가 사회적 각본을 만들어낸다는 사례가 인상깊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지키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억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말이다. 나영정 님의 글에서는 '오염'과 '스킨십'이라는 단어가 매우 강력했다. 나의 인식이 변화될 때 내 몸과 체질도 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김홍미리 님의 글은 요근래 페미니즘 판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믿는페미를 시작하면서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 맞느냐'는 질문을 여러차례 받았던 터라, 많이 공감되었다. 마지막 전희경 님의 글은 내가 '활동가'로서 느끼던 부정적 감정들에 대해서 마치 선배 활동가가 '나도 그랬어'라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밑줄을 치고 또 치면서 읽었다. 결국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의 힘을 낼 수 있었다.
<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 권김현영>
정희진은 칼럼에서 "운명은 구조의 힘에 대한 나의 대응(re/action)"이라고 쓴 바 있다.(14)
오히려 내가 여자라는 것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나'의 경험과 '여자'로서의 경험이 각각의 인용부호 속에서 서로 겉돌고 있다는 위화감이 여성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15f.)
지금도 나는 지적인 열망을 가진 여자들의 불안에 대한 이야기에 언제나 밑줄을 친다.(19f)
흑인의 역사, 제3세계 문학, 퀴어 비평 등 인종,지역,성 정체성 등의 차이에 따르는 이름은 한쪽에만 붙었다. (...) 왜 서구 백인 중산층 남성들의 이야기는 특수한 인종, 성별, 계급, 지역이라는 점이 생략될 수 있는 걸까.(24)
가장 어려운 건 제대로 방향을 잡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공부를 업으로 삼는 학자들조차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몰라 제국의 언어를 충실하게 번역해서 전달하거나 요약하는 식민화된 공부만을 반복하기도 한다.(34)
인도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의 표현대로 무지는 그 자체로 '특권'이다. 누가 이 상황을 참아 내고 있는지 모를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특권을 가진 이들에게만 가능하다. 서 있는 위치를 바꾸어 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른 질문이 만들어지고, 다른 질문은 다른 지식으로 우리를 안내해 간다.(39)
<할머니들 / 손희정>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라는 틀로는 할머니의 삶이 전혀 설명되지 않았다.(51)
이동과 체류, 세상으로부터의 감금과 자발적 유폐. (63)
'위안부' 투쟁은 다른 누가 아닌 '나이 든 여성들'의 투쟁이었으며, 그렇게 젠더화된 투쟁이었고, 그랬기에 지속의 힘을 가진 투쟁이었다.(65)
10년이 훌쩍 넘도록 나는 끊임없이 그를 이 체제의 희생자로 상상해왔다. 그 상상력이야말로 이 사회가 나에게 강요한 상상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회가 '할머니들'을 지워 온 방식이기도 하다.(69)
<페미니스트이기보단,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 한채윤>
결국, 60대 레즈비언 부치가 이성애자 남성 가장과 똑같은 한탄을 내뱉는다는 것은 '성별' 자체가 아니라 허구의 성차가 현재의 사회적 각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81)
다만 그는 몇몇 상징적 코드를 활용한 '태도'만으로 자신의 성별을 표현하는 전략을 쓰고 있었다. (...) 오히려 생식기관을 중심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지 않는가. 우리가 누군가의 성별을 안다는 것과 그 성별을 인식한다는 것, 어떤 특별한 성별로 대한다는 것은 모두 별개의 것이다. (84f)
오히려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여전히 같다. 레즈비언이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의 성 정체성을 간단히 이성애자로 먼저 단정짓는 태도, 페미니스트가 이성애자만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는 것을 모른 척하며 내버려 두는 것 등 말이다.(94))
페미니스트 줄에 설 수 없다고 너무 일찍 각인되어 버려서...(100)
하지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답은 이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다. (101)
<세계와의 불화, 피부의 연대 / 나영정>
국가는 모든 국민을 여성, 혹은 남성으로 강제 할당하고 있기 때문에,(122)
캠프 이후에 이 여성들을 계속 만나고, 함께 자고 먹으면서, 일종의 '오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휠체어에 앉아서 보는 시선의 높이, 뇌병변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근육을 사용하는 방식을 익혀 나가는 과정이었다.(124)
이것은 비장애인의 세계에 익숙했던 내가 그간 맺어 왔던 관계의 방식과는 또 다른 노력과 감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125)
이러한 강력한 의미 체계에 도전하기 위해서, 최근에는 활동의 인식론과 방법론을 '스킨십'에서 찾아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안내하는 통로로 맞이하기 위해서 비장애인으로 살아왔던 몸과 감각에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127)
시각적, 촉각적, 후각적 스킨십의 기회를 차단당한 이들, 특정한 방식으로만 재현되는 이들과 관계 맺기 위해서는 피부를 맞대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29)
활동가로서 목표와 지향이 있다면 자아 안팎의 경계가 최대한 유연한 몸을 만들고, 그 몸으로 목소리와 몫이 더 작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것을 통해 또 변형된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는 것이다. (134)
나의 인식론을 변형시키고, 열정이 향하도록 손을 내밀었던 구체적인 타인이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골라낼 수 없다. (134)
<'페미니즘 고딕체' 권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법 / 김홍미리>
'페미니스트 연결감'(137)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기를 바랐고, 그 이름이 페미니즘이어야 했으며, 그 페미니즘은 우리가 모두 동의한 어떤 것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148)
개별적으로 열심히 분투하는 일은 자신의 정당성은 강화시켜 주지만, 다른 이의 분투를 알기 어렵게 만들면서 자기정당화의 서사에 갇히기 쉽게 한다. (149)
페미니스트는 인증을 통해 확인받는 자격증이 아니다. (...) 페미니스트는 '나는 페미니스트 맞나?'라는 질문 속에서 산다. 질문을 시작한 이상 누군가가 나를 페미니스트로 부르든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정하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164)
코르셋을 벗어던지기가 무섭게 서로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방어하는 모습들 속에서 왜 각자가 가진 무기가 '페미니즘'인가에 대해 되묻게 된다. (168)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 / 전희경>
훌륭한 인간이 되는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는 페미니스트라면, 더 정확한 언어를 만들고 그것을 의미 있게 작동시킬 책임이 있다. (193)
모든 사회 운동은 피억압자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피억압 당사자의 말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사회적으로 경청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성 자체가 곧바로 해석의 여지없는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직화를 통해, 운동을 통해, 좀더 정확하게 대화하려는 언어의 교환을 통해, 책임을 나누는 내부 민주주의 속에서 서로를 길러 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실이 '된다'. (194)
다만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 지금 이 관계가 깨져도 페미니즘은 계속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5)
조직의 역사성은 새로운 활동가에게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가. 세대적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평등하게 대화할 수 있으려면 조직 문화는 어때야 하는가. '자발성'이 성취였던 우리와 달리 '자발성'을 강요받아 너무 피곤한 새로운 세대에게, 자발성을 동력으로 하는 조직은 어떻게 작동 가능한가. (205)
공동체성은 세계관의 동일성에서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과 얼굴이 있는 시간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207)
분노와 비판과 문제 제기는 언제나 중요하지만, 또한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상하는 상상력, 구성원 개개인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신중함, '능력'의 차이(존재한다)를 조화시키는 시스템과 개인의 성장을 기다려주는 인내심, 그리고 '삑사리'와 지지부진과 성에 안 차는 불완전성의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관용의 에너지 같은 것들. 전부 소수 액티비스트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낯선 이들을 끊임없이 초대하고, 개인의 불완전성들이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장면들을 관찰하고, 나의 평범함을 발견하며 사람들과 대화하고 일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몸으로 나 자신을 변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209)
좀더 구체적인 것, 좀더 '몸'인 것, 좀더 피부의 촉감과 얼굴 표정인 것의 방향으로 말이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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