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2004)
체 게바라는 언제부터 혁명가였을까? 그를 떠올려보면 왠지 태어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을 것만 같고, 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는 남다른 가정사를 가졌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유약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남부럽지 않은 부모와 가족을 가진 엄친아 스멜을 풀풀 풍기는 한 청년의 모습이다.
모든 '경험'은 확실히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가장 좋은 통로는 누가 뭐래도 여행과 독서일 터, 영화의 주인공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23살 시절 떠난 여행에서 다른 세계를 경험했고, 그 경험이 그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사실 나도 신학을 하면서 답답함과 당혹감을 많이 느꼈다. 뭔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실체를 알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그런 상황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땅이 아닌 허공에서 발을 휘젓고 있는 신학, 내 삶과 하등 관계가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기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런 답답함과 당혹감이 점차 사라진 것은,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의 모습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직접 만나고 눈으로 보니 어렴풋했던 세상의 실체가 드러났다. 성경의 언어와 신학자들의 말은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발붙이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수 있었다.
물론 보고 경험한다고 해서 모두가 삶의 노선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도 다른 세계를 알게 되었지만 빨간약과 파란약 중 무엇을 삼킬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게바라도 다른 세계를 경험한 후, 그 세계를 잊고 살아갈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그가 밤중에 강물을 건너 나병환자들에게 가는 장면이 아마 그 순간이었던 듯. 그때부터 그는 '체' 게바라가 된 것일테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눈을 감고 자신이 본 세계를 망각하기로 결정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선택의 순간은 금새 다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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