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어깨에 올려진 부모의 손(오른손은 어머니의 손, 왼손은 아버지의 손처럼 묘사했다.)이 인상깊은 그림이지요.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을 묵상하며 자신의 영적 여정을 돌아봅니다. 작은아들, 큰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에서 달아났던 자신의 모습을 기술하면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는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받았음을 기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주 잘 알고 있던 성경의 비유이지만, 헨리 나우웬의 묵상과 자기 고백이 너무나 나의 모습과 같아서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소명에 따라 살 수 있을까?
먼저 헨리 나우웬은 작은아들로서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실제로 이 비유를 읽을 때 많은 이들은 자신을 작은아들로 보곤 합니다. 방황하고, 신의 품에서 벗어나고, 제 멋대로 살기를 원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내면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세파에 휩쓸려버린 모습. 그러면서도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습. 인생이 망가져버린 것 같은 느낌들. 낯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들은 참 용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죽음에 놔두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기어이 돌아갔으니까요. 자기 신분을 회복할 수 있을거라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이 살 수 있는 방법임을 믿었을테니, 아버지가 나를 내쫓지는 않을거라는 신뢰가 있었을테니 돌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
집은 "사랑하는 아이야, 네게 은혜를 베풀어주마"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내 존재의 중심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시 23:4)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마 10:8) 내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거절당할까 걱정하거나 인정받는 데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잘못을 지적하며, 위로하고, 훈계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72)
필요와 욕구가 뒤엉킨 수렁에 빠져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주위 환경에 홀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남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전부 의심스럽습니다.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며 내면의 자유를 잃어버린 채, 세계를 내 편과 적으로 갈라놓습니다. (...) 그러다 비슷한 것이 눈에 띄면 내뱉습니다. "그것 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잖아." 그리곤 돌아서자마자 혹시 진심으로 사랑해줄 이가 없는지 두리번거립니다. (87)
산상수훈은 고향, 곧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가장 단순한 경로를 제시합니다. 그 길을 따라가노라면 위로를 받고, 사랑을 입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등 두 번째 유년기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어린아이가 된다는 건 산상수훈을 삶으로 살아내서 하나님나라로 통하는 좁은 문을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102, 103)
-
그러나 내 마음을 울린건 '큰아들'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 내 모습이 완전 그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힘든 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올라오는 감정, '억울함' '시기심' 바로 큰아들의 감정이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인정을 못받지? 나는 왜 어릴 때부터 어른의 역할을 요구받았지? 왜 나를 착취하는가? 가만히 있을 때는 성실하게 일하곤 하지만 누군가와 비교하게 될 때, 밑바닥에서부터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나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나와 같은 감정을 경험하고, 그도 괴로워한다는 것을 읽고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도 작은아들처럼 신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탕자이며, 반대로 말하면 큰아들도 신이 간절히 찾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 존재를 다시 보게 했습니다. 나는 작은아이기도 하고 맏이기도 하다는 것. 과거의 어떤 일이 나를 괴롭게 할 지라도,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신의 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 머리로는 알겠는데 아직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간절히 찾고 있다는 걸 알고 빨리 돌아가서 편히 쉬고 싶습니다. 아, 편히 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의 축제에 참여한다는 건 나에게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
퍼뜩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질투,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묘한 독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불평을 입에 달고 지냈는지, 얼마나 적대감에 찌든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그처럼 오래도록 자신을 작은아들로 여길 수 있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큰아들이었지만 동생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평생 '집'을 떠나지 않았을지라도 길을 잃고 방황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44)
큰아들의 상실감과 작은아들의 방황을 삶에서 모두 체험했던 작가는 만년에 <탕자의 귀향>을 그리면서 두 아들을 모두 화폭에 올렸습니다. 둘 다 치유와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둘 다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둘 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회심을 찾자면 아무래도 집에 머물고 있는 이가 돌이키는 경우를 꼽아야 할 겁니다. (121)
집을 떠나 방황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노하고 시기하는 모습 자체가 여전히 무언가에 속박된 종의 신세라는 증거입니다. (128)
집으로 돌아온 작은아들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암흑의 기운이 중심에서 솟구쳐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마음 깊이 숨어 있던 분노하고, 오만하며, 몰인정하고, 이기적인 자아가 몇 년 새 점점 강해지더니 마침내 사납게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을 찬찬히 살피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과연 정욕과 원망에 찬 분노 가운데 무엇이 더 해로운지 궁금했습니다. (130)
원한에 눈이 멀어 길을 잃었을 때, 질투에 사로잡혔을 때, 순종과 책임의 굴레에 갇혀 종처럼 살 때 어떻게 하면 되돌아설 수 있을까요?(140)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2) (...) 거룩한 자녀들은 하나님나라에 저마다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주님의 거처입니다. (148)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자가 생산하지 못합니다. 제힘으로는 분노의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력으로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교제를 나누지도 못합니다. (151)
원망과 감사 사이에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나타나셔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권하십니다.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어둠에 남아 처지가 더 나아보이는 이를 가리키며 지난날 아픔을 가져다주었던 갖가지 불행한 사건들을 탓하면서 원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나를 찾아오신 분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내 존재와 소유 전체가 순전히 선물임을 깨닫고 깊이 감사하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158)
주님은 거룩한 백성들을 특별히 잘한 일이 없어도 대단한 일을 해낸 이에 못지않게 즐겁게 지낼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의 자녀들로 여기십니다. (188)
자신을 '주님이 반드시 찾아야 할 만큼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저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연 나는 그 사실을 믿고 있는 걸까요? 여기에 내 영적인 씨름의 고갱이가 있습니다. 자기 부정, 자기 비하, 자기 혐오와 벌이는 투쟁입니다. 세상과 그 권세를 잡은 마귀들은 나를 흔들어서 스스로 무가치하며, 아무 쓸모가 없고, 하찮은 존재로 여기게 하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고 있으므로 싸움은 언제나 치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194)
하나님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전부 해결되어서가 아닙니다. 인류의 괴로움과 고통이 끝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허다한 무리가 돌아와서 주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하는 까닭에서가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자녀 하나로 인해 환호하십니다. 나는 그 기쁨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207)
나로서는 작고, 드러나지 않으며, 주위 사람들이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일들을 가지고 기뻐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나쁜 전갈을 받고, 전쟁과 폭력과 범죄에 관한 기사를 읽고, 갈등과 혼란을 지켜볼 마음의 준비를 늘 갖추고 삽니다. (...)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서 슬픔뿐일 것 같은 곳에서도 기쁨을 볼 줄 아는 친구가 있습니다. (...) 하지만 굵직굵직한 세상사를 두루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경험담을 들려줄 일이 있으면 항상 자신이 찾아낸 희미한 기쁨들을 나눌 뿐입니다. (208)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탕자가 가져다준 기쁨에 푹 빠졌습니다. 거기서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을 힘닿는 데까지 '훔쳐다가' 남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쳐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세상 사람들이 다 돌아오지도, 온누리에 평화가 깃들지도, 모든 고통이 사라지지도 않았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돌이켜 집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순간을 감지하며, 수많은 소망의 징표를 목격합니다. 세상 문제가 죄다 해결될 때까지 기쁨을 보류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변에서 하나님나라를 엿볼 수 있는 실마리를 볼 때마다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훈련입니다. (209)
-
그리고 헨리 나우웬은 아버지로서의 소명을 받았음을 자각합니다. 활동가로서, 목회자로서 살아가려는 나에게 이보다 더 큰 도전은 없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용서받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용서'란 시작일 뿐이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나도 누군가로부터 케어받기를, 챙김받기를 기대하고 있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은 엄두가 나지를 않더군요.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용서해야 할 대상이 눈 앞에 있는데, 보류합니다. 이것이 지금 내 상태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듯,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전제로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먼저 내가 사랑받고 용납받는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누리는 것 부터가 시작일테니까요. 신의 품 안에 거하며 충분히 쉬는 것, 그것이 어떤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감각을 끄집어내는 훈련을 먼저 해보려 합니다. 지금 내게 무엇보다 필요한건 그 감각을 찾는 일입니다.
-
수 할머니는 대꾸할 틈도 주지 않았습니다. "평생 친구를 찾더군요. 서로 낯을 익힌 뒤부터 줄곧 지켜봤는데 사랑에 목마른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일이라고 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죄다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방팔방 관심과 인정, 지지를 구걸했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진짜 소명을 추구할 때가 됐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온 자녀들을 반가이 맞아주는 아버지가 되라는 겁니다. (...) 데이브레이크 식구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 대다수는 당신에게 좋은 친구라든지 친절한 형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참다운 동정의 권위자'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49)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것이 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의 고갱이입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231)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쪽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옮겨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한 발짝 한 발짝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감정 저런 생각이 아낌없이 주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상처를 입힌 사람한테 에너지와 시간, 돈, 무엇보다도 관심을 줄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그걸 고맙게 여길 줄 모르는 상대에게 삼을 더 나눠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도 기꺼이 용서하고 거기에 더해 모든 것을 주어야 하다니!' 그렇지만 영적으로 보면 아픔을 준 이들은 사실 나의 혈족이고 피붙이들입니다. (242f)
이렇게 영적인 아버지의 삶을 살아내자면 집에 머무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 훈련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제힘으로 대단한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가엾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거역하는 작은아들과 원망 가득한 큰아들을 무대로 불러올려, 하늘 아버지가 내게 베푸신 조건 없이 용서하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며, 내 아버지가 집에 머무시는 것처럼 집을 벗어나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그 거룩한 부르심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246)
라르쉬 식구들의 장애는 내 장애를 폭로합니다. 그들의 아픔은 내 아픔을 생생하게 비춰냅니다. 그들의 연약함은 내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251)
스스로 아버지의 신분을 내세우는 이가 가물이 콩 나듯 드물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당해야 할 고통은 너무 뚜렷하고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255) 하지만 내 욕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이 들립니다. "걱정마라. 독생자가 네 손을 잡고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이끌어줄 것이다." 이것은 믿을 만한 음성입니다. 가난하고, 연약하고, 소외되고, 거절당하고, 잊혀지고, 미미한 사람들...언제나 그랬듯이 이들은 내게 아버지의 자리를 맡아주길 요구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56)
-
'colle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주일닼] 2017-1. 반짝이는 박수소리 (0) | 2017.01.08 |
---|---|
2017-1.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 (0) | 2017.01.04 |
2016-??. 해어화 (2016, 박흥식) (0) | 2016.07.31 |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0) | 2015.10.28 |
대학살의 신 (0) | 2014.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