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시국단식농성장 매일기도회 설교
<열왕기상 19:1-8>
이 뜨거운 거리에서 단식함으로 기도하며 투쟁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이 농성을 시작한지 벌써 2주가 훌쩍 지났습니다. 오며가며 이 농성장에 들릴 때마다 늘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시고 힘차게 이야기해주시는 모습을 보았지만, 사실 얼마나 힘이 들고 피곤할지, 저로써는 짐작만 할 뿐입니다. 저는 이 단식농성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 몇 일간 동조단식 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겉으로는 힘들다 말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조금씩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곳에 있는 여러분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몸에 힘이 빠지는 것.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사실 이곳에 계신 여러분에게는 그것을 너끈히 이겨낼 만한 내면의 열정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실 수 있는 것이겠지요. 사실 정말로 힘든 것은 육체의 힘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기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
오늘 기도회를 감리교신학대학교 2005학번 동기들이 주관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05학번이라고 하면, 보통 1986년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들과 조금 다릅니다. 저의 외모가 동기들과 사뭇 달랐는지, 사람들은 조심스레 저에게 묻곤 했습니다. “재수해서 들어온 건 아니죠?” 그런 오해를 받으며 지냈지만 사실 저는 이들보다 한 살 적은 1987년생입니다.
제가 이들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것을 굳이 말하고 싶어서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아닙니다. 강조점은 1987년에 있습니다. 87년도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던 해입니다. 저는 최규석이라는 작가를 참 좋아하는데, 그가 그린 ‘100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6월 민주항쟁을 다룬 만화이지요. 이미 이 만화를 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 작품의 제목이 ‘100도’인가 하면, 학생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힌 주인공이, 감옥 밖에서 싸우다 다치고 죽어나간 동지들의 소식을 들으며, 그리고 점점 견고해지는 독재의 소문을 들으며 자조하듯 말합니다. “두렵습니다. 이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정말 이길 수는 있는 건지, 세상을 정말 바꿀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요.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합니다. ”물은 100도가 되면 반드시 끓는다. 언젠간 100도가 된다.“ 그렇습니다. 그 날. 세상의 온도가 100도가 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이들은 싸워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10일.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그 날이 옵니다. 가슴 뜨거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고, 결국 6월 29일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항복을 선언하죠.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펼쳤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고통받던 이는 고통이 사라지길 바랐고 누울 곳 없던 이는 보금자리를 바랐고 차별받던 이는 고른 대접을, 그렇게 각자의 꿈을 꾸었겠지만...우리가 얻어낸 것은 단지 백지 한 장이었습니다." 단지 백지 한 장. 여러분, 세상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지지하고 응원하러 온 제가 오히려 기운 빠지는 이야기를 햐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세상이죠. 그래서 지젝은 '혁명보다 중요한 건 혁명 그 다음날이다'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 성서의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아합’이라는 왕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이세벨이라는 페니키아 사람과 결혼하였고, 이세벨을 통해 ‘바알’신앙을 적극적으로 숭배하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알은 풍요의 신이죠. 풍요, 물질, 성공, 복, 권력!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시대가 좇는 신앙입니다.
이런 세상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엘리야는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에게 '정신차리라‘며 목숨을 걸고 외친 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아합이 정신을 차리지 않자, '좋다, 그럼 바알 신과 맞짱을 뜨자!'고 하며 바알의 예언자들과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무려 450대 1로 말입니다. 이 때 엘리야의 나이가 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유사한 걸로 봐서 청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튼 그 배틀의 결말은 어찌 되었는지 아시죠? 보란 듯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엘리야의 고함에 하나님이 불을 내리셨고, 가뭄을 그치게 하셨고, 바알의 제사장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이제 바알이 발붙일 곳은 없어보였고, 세상은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이 멋진 광경을 보고 흥분해서 다음 장을 펼쳤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아까 말했던 그 만화의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느끼는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까? 바뀌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멈추었지만 오히려 엘리야는 기력이 약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이세벨이 엘리야의 행적에 노하여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전국에 수배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같았으면 ‘어디 한번 죽여봐라, 옳은 일을 한 나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당당해야 할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상상보다 더 극심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혁명 그 다음날의 무력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 컸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뛰어난 성취를 했다 해도,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해도, 절망감과 무력감은 예외 없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그래서 우리는 때로 엘리야처럼 아무도 없는 광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 나무 그늘 아래 숨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어디나 그 로뎀 나무 아래가 될 수 있습니다. 투쟁의 열기가 타오르는 현장 한 가운데일지라도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곳이 그 로뎀 나무 아래일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숨어있는 그 나무 그늘 아래로 하나님께서 밥상을 차려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죽기를 요청하고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온 것은 더 강한 부르심이 아니라, 구운 떡과 물 한 병이었습니다. 너 왜 이렇고 있느냐고 질책하는 것도 아니고, 더 가열차게 전진해야 한다며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깨 툭툭 치며 “밥 먹자”고 말씀하십니다.
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이고, 에너지입니다. 우리가 손쓸 수 없는 존재의 흔들림, 예고 없이 찾아오는 허무감과 무력감으로 인해 피로한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힘을 주기 원하시는 그 분. 우리 하나님은 밥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갈 길이 남았다. 너가 가야할 길을 다 가지 못할까 걱정되는구나'라며 우리를 일으키고 생기를 주시는 그 분. 그 분을 이곳에서 만나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힘과 생기를 이 곳에서 얻길 바랍니다.
우리 그 힘으로 다시 너끈히 일어나 사십일 밤낮을 또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종내에는 여러분이 스스로 밥이 되어, 이 땅의 고통 받는 자들, 불의에 희생당한 자들, 아이를 잃고 통곡하는 자들, 쓰러져 외칠 힘조차 없는 그들에게! 힘주고 생명주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힘을 받아, 우리에게도 그 힘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그 길, 함께 연대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면서 끝까지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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